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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民正音以後の韓国語

1418年:世宗大王即位。

1443年:世宗25年。訓民正音創製。1443年旧暦12月30日の訓民正音創製に関する記録。(↓)※以下引用文献の内容はすべて朝鮮王朝実録にある内容である。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1446年:訓民正音の解説書である訓民正音(解例本)を頒布する。諺文庁を設けて訓民正音関連のことを任せる。下級官吏を選ぶ試験(吏科・吏典)の試験科目として訓民正音を入れる。1446年10月10日のハングル使用の例。(↓)

임금이 대간(臺諫)의 죄를 일일이 들어 언문(諺文)으로써 써서, 환관(宦官) 김득상(金得祥)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게 하였다.

1447年:釈譜詳節(釈迦の一代記)と月印千江之曲(仏教を賛美する歌)を出版する。漢字の発音を整理した「東国正韻」を完成する。朝鮮建国の李氏先祖を賛美する歌「龍飛御天歌」を印刷して配る。

1448年:四書(論語・孟子・中庸・大學)の翻訳を命ずる。

1450年:世宗去る。

1504年:燕山君10年。朝鮮10代目の王「燕山君(1476~1506)」の失政を指摘する諺文(ハングル文書)事件が起こり、ハングル教育を禁止し、ハングル書籍を燃やす。→ハングルが普及されている証拠。

1504年燕山君10年7月19日のハングル投書事件。 (↓)

신수영(愼守英)이 밀계(密啓)하기를,  “새벽에 제용감 정(濟用監正) 이규(李逵)의 심부름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의 집에 투서(投書)하였기에 보니 곧 익명서(匿名書)이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규를 불러서 ‘네가 무슨 글을 신수영의 집에 통하였느냐.’고 물으라.”  하였는데, 규가 ‘그런 일이 없다.’ 하니, 전교하기를,  “곧 도성의 각문을 닫고, 위장(衛將) 각 2원과 부장(部將) 각 4원과 입직(入直)한 사복(司僕)들이 나누어 맡아 지키어 사람이 나가는 것을 금하라. 또 창의문(昌義門)부터 동소문 성 위까지는 이미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늘여서 지키게 하였거니와, 창의문부터 돈의문(敦義門)·남대문·남산·동대문·동소문 성 위까지는 다 군사를 시켜 파수세워서 도망하는 것을 막으라.”  하였다.

드디어 사람을 물리치고 봉서(封書)를 내렸는데, 그 글 석 장이 다 언문(諺文)으로 쓰였으나 인명은 다 한자로 쓰였으며, 첫 표면에는 무명장(無名狀)이라 쓰였다. 그 내용은 첫째는,  “개금(介今)·덕금(德今)·고온지(古溫知) 등이 함께 모여서 술 마시는데, 개금이 말하기를 ‘옛 임금은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 머리를 끊듯이 죽이는가. 아아! 어느 때나 이를 분별할까?’ 하고, 덕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하려니와, 무슨 의심이 있으랴.’ 하여 말하는 것이 심하였으나 이루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이런 계집을 일찍이 징계하여 바로잡지 않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글을 던져 버리는 자가 있으면, 내가 ‘개금을 감싸려 한다.’고 상언(上言)하리니, 반드시 화를 입으리라.”  하였고, 둘째는・・・

1511年(中宗6年)9月2日。漢文小説の薛公瓚傳がハングルで翻訳されて多くの人に読まれる。薛公瓚傳は現実批判の内容であるため焼却されるがハングル翻訳本が1997年に13ページ発見された。これでハングルが民衆に普及されどれだけの影響力を発揮するのかが分かる。(↓)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妖妄)한 것인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文字) 로 옮기거나 언어(諺語) 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하여 거두어 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527年:漢字学習書である「訓蒙字會」が出版される。

1590年:儒教の経典である四書三經をハングルで翻訳した「七書諺解」が出版される。

1692年:粛宗18年。政府を批判するハングルの歌が流行る。(↓)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조정의 기강(紀綱)이 날로 무너져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돌아보고 거리끼는 바가 없게 되어, 길거리에서 말하고 항간(巷間)에서 논평하는 것도 오히려 또한 부족하게 여겨 언문(諺文) 으로 노래를 짓기까지 하였으니, 마음을 씀이 지극히 교묘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도성 안의 초부(樵夫)들이 노래부르게 되다가 어느새 관서(關西) 기녀(妓女)들의 노래가 되어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전파하게 되었으니, 듣기에 놀랍고도 의혹이 생깁니다. 온 조정의 진신(搢紳)들이 기롱을 받게 되고 한때의 우매한 민중들이 멋대로 비웃는 짓을 하여 조정을 경멸하고 당세(當世)를 모욕함이 심하니, 자세하게 핵실(覈實)하여 세밀하게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듣게 된 사람 심표(沈杓)를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중하게 심문하여 적발(摘發)해 내어서 율(律)대로 과죄(科罪)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했다. 조금 있다가 심표가 연좌된 바는 전해 들은 것에 지나지 않아서 핵실해 내기 어렵다 하여 놓아 주도록 명하고, 일도 드디어 정지되었다.

1791年:正祖15年。漢文・ハングル併記の公文書を貼る。(↓)

옛날 성군이 대궐 문 밖에 법령을 내걸던 전례대로 지금 입법(立法)한 내용을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어 항간의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몰라 죄에 걸려드는 근심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1894年:甲午更張によって公文書にハングルを使うことを表明する。

1896年:最初のハングル新聞「独立新聞」創刊。

1909年:純宗9年8月16日。韓国銀行設立協定書をハングルで作成する。朝鮮王朝実録にもハングルが登場する。(↓)

제6조
한국 정부는 한국은행 창립 후 5개년간은 한국 정부 소유주 이외의 주식에 대하여 한 해에 100분의 6의 비율에 해당하는 이익 배당을 보증할 것으로 한다. 이상의 각서를 한글과 일본글로 각 2도(度)를 작성하여 교환해서 뒷날의 증거로 하기 위하여 기명(記名)하고 조인한다.

융희(隆熙) 3년 7월 26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2년 7월 26일  통감(總監) 자작(子爵)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1921年:朝鮮語学会(現ハングル学会)創立。

1938年:学校で朝鮮語教育を禁止する。

1940年:訓民正音(解例本)が安東で発見される。朝鮮語での本の出版を禁止する。

1945年:開放とともにすべての文書に漢字を使わずハングルで(横書き)書くことにする。

1999年:国立国語院から標準国語大辞典を発行する。

ハングル以前の韓国語

作成:2011.9.6(更新:2017.2.2)